사우디, UAE, 바레인, 이집트와 카타르 간 외교분쟁이 시작된지 1년이 지났음에도 좀처럼 해결기미를 보이지 않고 한동안 잠잠했던 가운데, 이번 분쟁의 주요 당사자인 사우디와 카타르가 16년만에 월드컵 무대로 복귀한 사우디의 참패로 끝난 월드컵 개막전 이후 다시 한번 뜨겁게 맞부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카타르의 선공
일단 선공은 이스라엘을 제외한 중동-북아프리카 지역 내 러시아 월드컵 독점 중계권을 가지고 있는 비인 스포츠가 날렸습니다. 사우디의 지원을 받고 있는 beoutQ 스포츠라는 채널이 중계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사우디의 월드컵 개막전을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 무단으로 송출했다며 FIFA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했고, FIFA가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자 비인 스포츠는 개막일로부터 5일간 거의 쉬지 않고 하단 자막을 계속 내보낸 바 있습니다. 이 하단 자막은 방송 자체에서 보내는 경기 관련 자막 정보를 가릴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beoutQ 스포츠 채널은 카타르 외교 분쟁이 시작된 후 방송시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름에서 보여지듯 중동 북아프리카 시장의 인기 스포츠 이벤트 중계를 독점하고 있는 비인 스포츠를 의식하고 만들어진 무료 채널입니다. 알자지라 스포츠에서 이름을 바꾼 비인 스포츠는 후발 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카타르의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기존의 방송 사업자들을 밀어내고 월드컵, 올림픽, 주요 유럽 리그, 챔스, 아챔 등 이 지역 시청자들에게 인기가 높은 스포츠 이벤트의 중계권을 싹쓸이한 후 종합 엔터테인먼트 채널로 덩치를 더욱 불려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역 내 다른 스포츠 방송 사업자들도 중계권 경쟁에 도전했지만 자금력에서 월등히 앞선 비인 스포츠를 상대할 수는 없었고, 비인 스포츠는 유명 전현직 축구인들을 해설 위원 등으로 영입하며 그 영향력을 확대해 갔습니다. 비인 스포츠는 지역 내 독점 사업자임을 앞세워 월드컵 때만 되면 신규 채널을 만들어 월드컵 패키지라는 명목으로 기존 가입자들에게조차 별도의 추가가입을 요구하며 투자자금을 회수하는 악랄한 마케팅 방식을 고수해 왔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카타르와의 외교분쟁 시작 후 다른 알자지라 계열 채널들과 함께 비인 스포츠를 차단했던 4개국 중 일부는 비인 스포츠에 한해서는 송출을 재개하는 우여곡절을 겪었고, 이에 대한 차단을 풀지 않은 사우디쪽에서는 별도의 채널을 만들겠다며 나섰지만 중계권을 갖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결국 해적방송이 될 수 밖에 없었죠. 비인 스포츠는 피파 돈놀이의 꽃인 월드컵 방송을 빌미삼아 선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카타르쪽 매체에서는 해적방송을 조장하는 사우디에게, 재산권이 어떻게 될지 알고 투자할 수 있겠냐며 조롱섞인 드립을 날리고 있죠.
사우디의 반격.
비인 스포츠가 beoutQ 채널의 해적방송질에 대해 FIFA의 등을 업고 선공에 나서자 개막전 참패의 후유증 속에 숨을 고르고 있던 사우디 역시 비인 스포츠에 대한 대응에 들어갔습니다. 사우디는 비인 스포츠의 주장에 대해 자신들도 해적 방송 수신기 단속에 들어가 적반될 수천대의 수신기를 대대적으로 파기했다고 밝힌 데 이어, 결국에는 전현직 축구인과 해설자들이 중심이 되어 지극히 정치적인 비인 스포츠의 문제를 제기하는 청원 사이트 Sports 4 Everyone을 개설하고, 사우디 축구협회가 축구와 정치를 연관시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반대하는 피파에 비인 스포츠 방송의 정치적 편향성을 문제삼아 이를 위반한 비인 스포츠에 대한 징계 및 중계권 박탈을 정식으로 요청하기에 나섰습니다.
사우디측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은 다양한 외국어로 제공되는 비인 스포츠 채널 중 아랍어 채널입니다. 정치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영어 방송과 달리 아랍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아랍어 방송을 토해 모체인 알자지라 방송처럼 스포츠 중계를 빙자하여 개막전에서 대망신을 당했던 사우디 국대 선수단 뿐만 아니라 2026년 월드컵 개최지 선정 과정에서 모로코 대신 북미 3개국을 지지한 것 등을 문제삼아 사우디 정부를 싸잡아 비난하는 드립을 노골적으로 날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2010년 아프리카 대륙 최초로 남아공 월드컵이 열렸던데다가, 2022년 아랍국가인 카타르 월드컵이 개최될 예정이기에 1994년 미국 월드컵 이후 월드컵을 개최한 적이 없는 북미 대륙에서 월드컵을 개최하는 것이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아랍 국가에서 월드컵이 열리는 것보다 명분에서도 더욱 앞선 것도 부인할 수 없는데 말이죠.
지난해 외교분쟁이 발생하면서 카타르는 내부 결속력 강화를 위해 노골적으로 정치색을 강조해왔으며, 우리도 그 사례를 눈 앞에서 직접 목도한 바 있습니다. 외교분쟁 시작된지 며칠 뒤에 카타르 도하에서 33년만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카타르와의 월드컵 최종예선 경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통치자 셰이크 타밈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흔들고 경고를 받았던 핫산 알하이도스의 선제골 세리머니나, 우리에겐 손흥민 부상 조롱 세리머니로 논란이 되었던 아크람 핫산 아피프의 결승골 세리머니가 바로 그 것이죠. 사실 카타르 선수들에겐 고립된지 얼마 안되 열린 경기에서 33년 만의 대한국전 승리를 앞두고 통치자 셰이크 타밈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보여주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둔 것이었습니다만...
카타르가 국내외 대회를 가리지 않고 방송이나 각종 매체를 보여주는 노골적인 정치색은 비단 카타르 선수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외국인 선수들에게도 경기장 밖에서도 셰이크 타밈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힌다던가, 카타르 외교분쟁과 관련하여 카타르가 피해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정치적 발언을 방송해오고 있었기에 비인 스포츠 출연진의 발언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냥 카타르 방송이 카타르 방송한거죠.
아울러 자신들이 비방하고 나선 해적방송과 관련해서도 카타르의 이중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비인 스포츠는 정작 이스라엘 공영방송의 해적방송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의 월드컵 중계권을 확보한 이스라엘 공영방송 KAN은 일찌감치 요르단, 이집트 등 인근 아랍국가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아랍어 중계방송을 무료로 송출한다고 일찌감치 비인 스포츠 측은 이에 대해서는 정작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것도 의아한 점입니다. 자신들이 확보하여 별도의 유료 패키지로 팔아먹고 있는 독점 중계시장의 시청자드를 상대로 무료로 방송을 내보내는데 말이죠. 정작 알자지라 방송에서는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유착설을 잇달아 보도하며 사우디 정부를 비난하기에 급급한 이들이, 정작 스포츠 방송에서는 해적방송에는 광분하면서도 자신들의 시장을 침범하여 계약적으로는 해적방송이나 다를 바 없는 이스라엘 방송의 행위에 대해서는 무응답이니까요.
비인 스포츠가 정치적으로 취하고 있는 이중 스탠스는 모체인 알자지라 방송에서 비롯된 알자지라 신드롬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것이 사우디측의 시각이고 피파에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알자지라 방송은 절대권력이 보여주거나 다루기 싫어하는 타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용방송이 중심인 아랍 미디어계의 이단아로 주목을 받았지만, 그 날카로운 보도정신이 정치적 프로파간다와 결합하여 정작 자신들의 자금줄인 카타르 정부의 치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자신보다 강한 이웃 나라의 정부를 타겟으로 삼았기에 카타르 정부의 테러 조직조차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자금과 타국 정부와 국민 사이에 불신을 조장하는 미디어를 양손에 쥔채 미니 국가의 한계를 딛고 역내 영향력과 존재감을 높이려는 카타르의 정책이 큰 문제라고 여기고 있는 사우디를 위시한 4인방은 카타르 정부에 고립사태를 종결할 수 있는 선제조건 중 하나로 알자지라 방송과 친 카타르 미디어의 폐국을 요청해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분쟁] 카타르가 단교 사태 종식의 전제조건으로 사우디, UAE로부터 받은 청구서 내역 참조) 카타르 입장에선 절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요.
무엇보다 사우디의 무기력한 경기력을 탓하기 전에 자금력을 바탕으로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자국 리그에서 뛰던 우수한 외국 선수들을 단체로 귀화시켜 카타르 국대의 경기력을 향상시키고 정치 놀음에 써먹으면서도 정작 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실력엔 여전히 부족한 자신들의 실력부터 뒤돌아 봐야 할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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