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6일 UAE 정부는 2018년을 자이드의 해로 정한다고 공식 발표했었습니다. 2016년 독서의 해, 2017년 나눔의 해와 같이 사람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의미를 담지 않고, 특정인의 이름을 딴 것은 바로 2018년이 UAE가 국부로 추앙하고 있는 셰이크 자이드 빈 술탄 알나흐얀의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이고, 이를 8월 6일에 발표했던 이유는 셰이크 자이드가 아부다비 통치자에 취임했던 1966년 8월 6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Light Up 2018로 명명한 부르즈 칼리파의 새해맞이 레이저쇼는 전세계에 자이드의 해를 광고하는 대규모의 퍼포먼스를 선보였죠.
UAE의 국부 셰이크 자이드 빈 술탄 알나흐얀 (1918~2004)은 아부다비를 통치했던 셰이크 술탄 빈 자이드 알나흐얀의 막내 아들이자 넷째 아들로 아부다비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네 어르신들도 정확한 출생기록이 없기도 한 것처럼 셰이크 자이드의 정확한 생일은 불분명하지만, 공식적으로는 1918년 5월 6일을 탄신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자이드라 이름을 지어주었던 아버지 셰이크 술탄 빈 자이드 알나흐얀은 1922년부터 26년까지 아부다비의 통치자를 역임하다 암살당했고, 그 이듬해인 1927년 셰이크 자이드는 자신의 제2의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이 된 알아인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가 성장할 무렵 알아인에는 현대적인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이슬람 교리에 대한 간단한 가르침을 받은 것이 그가 받은 교육의 전부였던 대신, 사막에서 베두윈 씨족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전통적인 기술 및 거친 환경 속에서의 생존능력을 키워나가면서 지혜를 체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정치적 기반을 닦게 된 것은 아부다비의 통치자였던 큰형 셰이크 샤크부트 빈 술탄 알나흐얀이 그를 1946년 아부다비 동부 지역의 주지사로 임명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첫번째 부인 셰이카 핫사 빈트 무함마드 빈 칼리파 알나흐얀과의 사이에서 장남 셰이크 칼리파가 태어났던 알무와이지 요새 ([알아인] 최신식 박물관으로 재탄생한 UAE 대통령 셰이크 칼리파의 생가 까스르 알무와이지 방문기 참조) 를 근거지로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빈곤하고 질병이 창궐했던 알아인을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석유 시추 조사단을 지원하고 사우디와의 국경분쟁을 해결하면서 알아인의 전통적인 관개수로 시스템인 팔라즈를 복원하며 알아인 일대의 발전을 도모하게 됩니다. 알아인을 통치하면서 맞이하게 된 세번째 부인 파티마 빈트 무바라크 알깨뜨비와의 사이에서 자신의 차남이자 왕세제 셰이크 무함마드, 셰이크 함단, 셰이크 핫자를 얻게 됩니다. ([여행기] 알아인 3일차 (5) UAE의 국부 셰이크 자이드가 힘을 키웠던 시작점, 알아인궁 박물관 참조, 친동생인 셰이크 만수르는 아부다비에서 출생)
아부다비 전체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던 셰이크 자이드는 1958년에 처음 발견되어 1962년부터 수출하기 시작한 석유로 인해 역사의 주인공으로 도약하기 시작합니다. 석유 수출로 늘어나게 된 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셰이크 자이드의 큰형이자 아부다비 통치자였던 셰이크 샤크부트의 답답한 행보에 불안함을 느낀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영국의 승인 하에 의한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알아인 일대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던 셰이크 자이드를 1966년 8월 6일 아부다비 통치자로 추대했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아부다비의 통치자가 된 셰이크 자이드는 이듬해인 1967년 쿠웨이트에 있는 일본 대사관을 통해 콜럼비아 대학에서 석사를 갓 끝낸 젊은 일본인 건축가 타카하시 카츠히코를 영입하여 당시 4만명이 살고 있던 어촌 마을 아부다비를 현대적인 도시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도시 계획과 설계에 나섭니다. 초고층 건물이 밀집한 지역들이 다수 포진해 있고, 중구난방으로 길을 늘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운전하기에 정신없는 도로망을 자랑하는 두바이와 달리, 아부다비는 부국의 수도이면서도 두바이에 비해 단순한 도로망과 초고층 건물이 그다지 많지 않아 관광객에겐 크게 어필하기 쉽지 않지만, 거주민들에겐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 아부다비의 모습은 셰이크 자이드의 철학이 반영된 것입니다.
아부다비를 설계한 것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밝히는 그는 "초대형 메가 쇼핑몰과 같은 상업 건물, 수백만개의 호텔 객실, 호화스러운 콘도가 아부다비의 정신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알아인궁처럼) 오래된 궁전의 안뜰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 비전과 대망을 잃게 할 수도 있다."라는 철학으로 도시를 설계하고 그의 후임자들에게도 자신의 철학을 전해주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두바이처럼 글로벌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것보다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발전해나가며, 아부다비 시민들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한 셰이크 자이드의 철학에도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1 다른 아랍 도시에 비해 유독 이마라티들도 좋아한다는 아부다비 일대의 각종 일식당, 일본식 다도 공간 등 일본 문화의 영향이 큰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도시의 설계자였던 그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미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아부다비의 왕세제 셰이크 무함마드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오찬을 위해 종종 찾는 곳 중에 주마 아부다비가 있으니 말이죠. ([생활] 평범하게 식당에 점심 먹으러 온 실질적인 UAE의 통치자, 아부다비 왕세제를 마주치다. 참조)
아부다비 통치자가 되어 발전계획을 세우고 있던 1968년 1월, 셰이크 자이드는 이 일대를 방문한 영국 외무장관으로부터 충격과 공포의 통지를 받게 됩니다. 영국과 아라비아 반도 일대 토후국들간에 맺어진 조약을 폐기하고, 든든한 군사적 방패를 제공해주었던 영국군도 철수시킬 방침이라는 소식을 말이죠.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그는 영국군의 철수에 대비하여 군소 토후국들끼리 뭉쳐야 산다는 확신을 갖고 다음달인 1968년 2월 18일 아부다비와 두바이의 경계에서 두바이 통치자 셰이크 라쉬드 빈 사이드 알막툼과 회동을 갖고 연합국 수립의 원칙에 합의하고 인근 토후국들을 초대하여 오랜 협의 끝에 1971년 12월 2일 두바이에서 6개 토후국이 함께 한 UAE의 건국을 선포하면서. ([두바이] UAE 건국과정의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 에티하드 뮤지엄 방문기! 참조) 1971년부터 2004년 11월 2일 서거할 때까지 UAE의 초대 대통령으로 나라를 이끌며 사회자유주의에 입각한 통치철학, 사막의 녹지화, 타종교에 대한 관용, 국민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직접 고충을 듣고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 여성들의 권리를 좀더 포괄적으로 인정하는 정책 등 현재 UAE 통치철학의 기반을 닦아 UAE 건국자 겸 국부로 국민들에게 높이 숭상받고 있습니다. 현재 UAE의 사실상 통치자인 셰이크 무함마드는 민주주의나 입헌군주제 등의 도입에 상당히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아버지 셰이크 자이드의 통치철학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UAE 정부는 2018년 자이드의 해를 맞이하여 2018년에 지켜야 할 비전, 미션, 목표를 아래와 같이 세웠습니다.
- https://www.thenational.ae/uae/building-a-city-from-the-sands-1.53408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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