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언론계에서도 유명한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쇼끄지가 터키인 약혼녀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맡기고 만약 네시간 뒤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측에 연락해 달라는 말을 남긴채 결혼 준비를 위해 신청했던 서류를 떼러 이스탄불에 있는 사우디 영사관에 들어갔다가 사라진지 10일이 넘었습니다. 터키와 반 사우디 언론들은 사우디가 시체 해부전문가를 포함한 15명을 전세 비행기편으로 이스탄불에 입국시켜 영사관 내에서 그를 살해한 후 시신을 분해하여 리야드로 돌아갔다며 사우디 정부에 의한 암살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 사우디측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자말 카쇼끄지는 자신의 민원을 해결하고 영사관을 떠났으며 오히려 그의 실종과 관련되어 등장하는 가족들도 모른다는 약혼녀, 목격자, 신고자 등이 터키 및 카타르측과 연루된 인사들이고 그의 살해범으로 주장하고 있는 15명은 단순한 방문객일 뿐으로 그들의 주장은 사우디 정부를 음해하기 위한 음모론이라고 맞서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우디 정부의 암살설을 주장하는 터키 및 카타르 중심의 반 사우디 성향의 언론들도 군불만 지필뿐 명확한 물증을 제시하고 있진 못하지만, 여러가지 정황상 사우디 정부의 반박 역시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근거가 되지 못하는 궁색한 변명으로 여겨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신들이 비판적인 언론인 살해범이라는 프레임을 깨고자 한다면 자말 카쇼끄지가 무사히 영사관 밖을 빠져 나갔다는 CCTV 영상, 혹은 그가 살아있는 모습을 공개해야겠지만, 현 상황에서 사우디는 가장 기본적인 그의 생존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제시할 수도 없을테니 말이죠. 그의 실종 미스테리가 길어지면서 자말 카쇼끄지 쇼크는 오히려 사우디에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해 사우디가 홍해 관광 프로젝트를 발표했었을 당시 가장 먼저 투자하겠다고 나선 버진 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CEO가 투자철회를 선언했고, 역시나 지난해 첫 컨퍼런스에서 야심찬 초대형 미래 신도시 네옴 발표로 주목을 받아 올해엔 무슨 발표가 이어질지 화제를 모았던 제2회 미래 투자 이니셔티브에 참가하기로 한 언론, 업체들이 잇달아 불참을 선언하여 개최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으로 이어졌으니까요.
실종된 자말 카쇼끄지는 어떤 사람이며, 그의 사우디는 어떻게 변해왔던 것일까요?
자말 카쇼끄지의 가문과 이력
자말 카쇼끄지는 부유한 사우디 가문 출신입니다. 아랍어 이름으로는 낯선 카쇼끄지라는 이름은 그의 가문이 터키 카이세리 지방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카쇼끄지는 터키어로 "스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Kaşıkçı"에서 나왔다고 하네요.) 외과의사였던 그의 할아버지인 무함마드 카쇼끄지가 사우디 여성과 결혼하고, 오늘날의 사우디를 세운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의 개인 주치의가 되면서 카쇼끄지 집안은 사우디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친척 중엔 유명한 사람이 두 사람 있는데, 한 명은 삼촌으로 이란 콘트라 스캔들에 깊숙히 관여한 1980년대 당시 40억 달러의 재산을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진 억만장자이자 유명한 무기 거래상이었던 아드난 카쇼끄지이고, 또 한 명은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연인이었으며 파리에서 발생한 의문의 교통사고로 함께 사망했던 사촌 도디 파예드입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이해하기 위해 이력을 한번 살펴보죠.
- 1958년 10월 13일 사우디 메디나에서 출생
- 1970년대 고등학교까지 사우디에서 공부하면서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짐.
- 1982년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 1983~1984년 티하마 서점 지역 총괄 매니저
- 1985~1987년 사우디 가젯트 (영자 신문)와 자매지 오카즈 (아랍어 신문) 통신원
- 1987~1990년 앗샤르끄 알아우사뜨, 알마잘리아, 알무슬리문 등 여러 매체의 기자
- 1991~1999년 알메디나 주필 겸 편집장 대행
아프가니스탄, 알제리, 쿠웨이트, 수단, 중동 지역 특파원 역임
사우디 정보국 ([사회] 사우디의 국가정보원, 사우디 정보국 "무캇바라" 참조)을 위해서 일했으며, 이란 아프가니스탄 당시 미국과도 일한 것으로 추정. 이 과정에서 자말 카쇼끄지는 오사마 빈 라덴과 친분을 맺고 수차례 인터뷰를 땀과 동시에 무장세력으로 성장한 그와 사우디 왕가 사이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중재역할을 맡으면서 그에게 폭력행위를 중단할 것을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9/11 사태 이후 두 사람의 친분은 끊어짐. 사우디 왕가와 오사마 빈 라덴의 한때 친밀했던 거래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유일한 비사우드 왕가 출신 사우디인이 되었음.
- 1999~2003년 아랍뉴스 부편집장
- 2003년 알와딴 편집장. 와하비즘의 아버지 이븐 타이미야를 비평하는 칼럼을 실어 사우디 정보부에 의해 52일만에 해임. 이 해임건을 계기로 서구 매체에 자유진보 성향의 사우디 언론인으로 이름을 알리게 됨.
- 2003~2007년 영국으로 자발적인 망명
투르키 빈 파이살 알사우드 당시 주미 사우디 대사 보좌역 및 홍보 담당자로 근무
- 2007년~2010년 사우디 내 가장 진보적인 매체가 된 알와딴 편집장으로 복귀. 사우디의 엄격한 이슬람 통치규정을 비판하는 기사들을 잇달아 실어 해임.
- 2010~2016년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
알왈리드 빈 탈랄 왕자가 중도적인 매체를 지향하며 바레인을 본부로 하여 설립했던 알아랍 뉴스 채널 ([미디어] 알왈리드 왕자의 알아랍 뉴스 채널, 올 연말 공식 개국한다! 참조)의 국장으로 지명되었지만, 알아랍 뉴스 채널은 반정부 인사와 인터뷰를 문제삼은 바레인 당국에 의해 개국한지 24시간도 안되어 강제 폐국됨.
MBC, BBC, 알자지라, 두바이TV의 사우디 정치 해설자로 출연
알아라비야에 정기적으로 오피니언 게재 (2012~2016년)
- 2016년 트럼프 미대통령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사우디 당국에 의해 방송 출연 및 트윗 금지령이 내려진 것으로 알려짐.
- 2017년 미국으로 자발적인 망명을 떠나 9월부터 워싱턴 포스트에 카타르 고립사태, 예멘 내전, 캐나다와의 외교분쟁, 언론탄압 등을 주제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이끄는 사우디 정부를 비판하는 칼럼을 잇달아 기고 (링크)
- 2018년 10월 2일 주이스탄불 사우디 영사관에 들어간 이후 행방불명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몇 가지 눈에 띕니다.
1) 사우디 왕가와 오사마 빈 라덴과의 은밀한 거래관계를 아는 유일한 비 왕실인사, 그리고 자발적인 망명을 택했을 때도 주미 사우디 대사를 위해 일했을 정도로 사우드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친정부 성향 인사였지만, 두번째로 고국을 떠난 2017년 이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사우디 정부를 공개 비판하는 저격수로 변신.
2) 두 차례에 걸친 알와딴 편집장직 해임, 자신이 국장으로 개국했던 알아랍 뉴스 채널의 강제 폐국 사건에서 볼 수 있듯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 사우디인들과 달리 자신이 불이익을 당할지언정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힌 언론인
그의 일관된 행적을 볼 때 2016년 이후 친정부적인 시각에서 반정부적인 시각으로 급변한 사우디 정부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가 변했다기 보다는, 그가 인싸이더로, 때로는 정부의 정책을 견제하는 발언을 하면서 수십년간 봉사해왔던 자신의 나라가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급부상과 함께 급변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의 관점에서 지금의 사우디 정부는 그간 비난받아왔던 각종 관습을 철폐하는 잇따른 개혁정책으로 세계적인 화제를 끌어모으고 있지만, 그 이면에 숨겨있던 암연 역시 더욱 짙어지고 있을 뿐이니까요. 사우디 정부를 향한 그의 시각은 왜 바뀌게 되었을까요?
그의 이력에서 볼때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우디 정부는 이슬람 세력이 어느정도 기반을 가진채 건설적인 비판과 견제가 존재하는 곳입니다. 사우디 내에 그나마 있었던 종교적, 정치적 견제세력은 상대적으로 지지세력이 많지 않은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급격한 권력강화 과정에서 유명무실하게 되었지만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체제에서 붕괴된 사우디 국가 시스템의 세력 균형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제 이전 사우디의 국가 시스템은 사회적으로는 사우드 씨족과 종교세력 간의 갈등과 균형, 정치적으로는 사우디 군부 내 세력 균형에 의해 움직여 왔습니다.
1. 사우드 씨족과 이슬람 세력과의 갈등과 균형
이슬람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사우디는 가장 원리주의적이라는 와하비즘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양대 성지 수호자"라는 별칭에서 볼 수 있듯이 최고 통치자인 국왕 및 사우드 씨족이 종교인이 아닌 정치인입니다. 그럼에도 와하비즘이 사우디의 통치이념이 된 것은 애시당초 18세기의 혼란기에 아라비아 반도 통일에 관심이 많았던 무함마드 빈 사우드와 초심을 잃은 종교세력에 불만이 있던 와하비스트인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이 혼인으로 결탁하여 제1사우디 국가를 세웠던 것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우디의 역사는 사우드 씨족과 와하비스트 간 애증과 경쟁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역사] 사우디는 어떻게 건국되었을까? 사우드 씨족의 오랜 투쟁기,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사 참조) 사우드 가문보다 와하비스트들의 세력이 보다 강했던 제1사우디 국가의 경우 그 배타적인 종교적 테러행위가 빌미가 되어 멸망을 자초했던 것처럼, 사우드 가문은 종교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질 경우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이 위협받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사우디 왕국을 세운 압둘아지즈 국왕이 통일전쟁의 일등 공신임을 앞세워 영향력을 높여가던 민병조직 이크완을 궤멸시키고 잔존 세력들을 친위조직인 국가방위군으로 흡수했던 것처럼 사우드 왕가의 통치자들은 종교 지도자나 종교에 기반을 둔 사회운동을 통해 종교 세력이 지나치게 정치 세력화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견제해 왔었습니다. 이슬람 공화국임을 내세우고 있는 시아파 종주국 이란의 최고 종교 지도자가 대통령보다 더욱 높은 자리에 있는 것과 달리 사우디 내 최고 성직자인 그랜드 무프티는 자리 자체가 1953년 처음 도입되어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의 후손인 알 앗셰이크 가문 출신 중에서 국왕이 임명하고, 한동안 (1969~1993년)은 그 자리마저 비워놨을 정도로 말이죠.
1) 불과 몇 년전까지 강력했지만 지금은 쇠약해진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력 약화
1932년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건국 이후 종교적으로는 보다 관용적이며 온건했던 사우디 사회는 1979년 말 국부 압둘아지즈 국왕이 궤멸시켰던 이크완의 후손들이 시아파에서 제창하는 메흐디 재림을 앞세워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을 일으키면서 급변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그동안 사우드 씨족에 밀려 움추려 있던 종교세력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강경 보수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우드 씨족은 이슬람 종주국임을 자임하기에는 종교적인 뿌리가 없는 자신들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양대 성지 수호자"를 자임하면서도 정작 허술하게 그랜드 모스크 점거를 허용하면서 체면을 구길대로 구겼기에 이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 나야했을 국왕 이하 주요 왕자들의 처벌을 면하는 조건으로 종교 지도자들과 딜을 할 수 밖에 없었을테니까요.
1980년대 이후 와하비즘에 입각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종교경찰로 대변되는 종교세력에 눌려있던 사우디 정부는 2003년 5월을 계기로 성직자들에 대한 통제에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헐리우드 영화 킹덤의 모티브가 되었던 5월 12일 리야드 컴파운드 연쇄 폭탄테러가 그 시발점이었습니다. ([영화] The Kingdom, 왕국에서 피의 악순환을 이야기하다... 참조)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 당시 국가방위군 총사령관으로 사건 종결 후에도 경질은 면했지만 망신을 톡톡히 당한 바 있던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당시 왕세제 겸 실질적인 사우디 통치자가 폭탄테러 사건 이후 사우디 내에서 과격한 원리주의자들을 궤멸시킬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 당시에는 자신이 이들과의 전쟁에 나설 입장이 아니었지만, 2003년에는 다수파인 수다이리 세븐 이복형제들을 제끼고 다음 국왕 자리를 예약해 둔 왕세제였으니 말이죠. 이 선언의 일환으로 사우디 정부는 젊은이들에게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명분을 앞세워 친정부 성향의 성직자 기관을 세우고 과격주의 성직자들을 해고하기 시작하면서 사우디 내 성직자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위축시켜 왔습니다. ([사회] 사우디, 2003년 이후 이슬람 과격주의 성직자 3,500명 해고해! 참조) 베이비붐 세대로 급증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젊은층들이 어른 세대들과 달리 종교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성향을 띄게 된 것도 이들의 영향력을 위축시키려는 사우드 왕가에게는 그야말로 호재였던 셈이죠. 이는 압둘라 국왕이 국왕 취임 후 권력기반을 닦은 2010년 이후 사우디 정부는 안하무인으로 활동했던 종교 경찰의 영향력을 축소시켜 나가고 ([사회] 사우디 종교경찰이 과격 원리주의자들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유! 참조) 그랜드 무프티를 위시한 고위 종교 지도자들의 반발과 개혁주의자들의 반발 속에서도 나름 충분한 논의과정을 거쳐 느리지만 온건한 개혁정책을 펼쳐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현재의 사우디에선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이라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 개혁정책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정책에 수십년 동안 큰 목소리를 내던 종교 지도자들은 그전과는 달리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2) 일련의 이슬람 종교, 사회운동에 대한 강경한 탄압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의 촉매제가 된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걸프지역, 특히 사우디와 UAE 통치자들에게는 강렬한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첫째, 이슬람으로 결집한 민중세력들의 혁명으로 세속정권을 몰락시키고 이슬람 공화국을 세웠다는 점, 그리고 둘째, 이란 이슬람 혁명의 영향을 받은 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쉽게 일어날 수 있었던 건 자신들에게도 이란의 팔레비 왕조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그것이었습니다. 특히 통치 정당성 면에 있어 이슬람 종주국을 자처하면서도 최고 지도자가 성직자가 아닌 세속주의 통치자라는 아킬레스 건을 갖고 있는 사우디에서는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사우드 왕가 자체가 원리주의자를 신봉하는 와하비스트들과의 결탁으로 힘을 키웠으니 말이죠.
이란 이슬람 혁명에서 비롯된 이슬람 종교, 사회운동을 통한 정권교체에 대한 두려움은 아랍의 봄과 맞물려 사우디 정부가 무슬림 형제단을 극도로 위험한 단체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사우디 역시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가 예고되었지만, 정부의 통제정책 등으로 무산된 바 있으며 ([사회] 조용했던 사우디 "분노의 날", 군인들에게 불려들어갔던 사연 참조), 압둘라 국왕은 이에 감사한다며 대대적인 국민 회유책을 발표하기까지 했었죠 ( [사회] 압둘라 국왕, 약 150조원의 사회복지자금 운영계획 발표! 참조). 하지만, 아랍의 봄을 타고 무바라크 정권 몰락 이후 국민투표를 통해 무슬림 형제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선거에서 승리한 무르시 정권의 탄생은 그 위기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막대한 외교적, 경제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알후씨 반군을 없애겠다며 예멘 내전에 뛰어들고 헤즈볼라의 위상이 강화된 레바논 내정 개입, 자신들이 테러조직으로 규정한 무슬림 형제단 지원 등을 이유로 카타르 고립 사태를 이끌고 있는 것 ([분쟁] 카타르가 단교 사태 종식의 전제조건으로 사우디, UAE로부터 받은 청구서 내역 참조)은 사우디 내에서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이슬람 사회운동의 영향력 확대를 잠재우기 위한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무슬림 형제단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일 수 있다는 우려로 UAE 내에 국민투표와 같은 선거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할 수 없다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멘토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흐얀 아부다비 왕세제의 통치관과 반정부 시민운동을 명분으로 내세운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의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세 나라가 무슬림 형제단 척결을 앞세워 더욱 각별해지는 계기가 된 바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주요 외교정책들은 자말 카쇼끄지가 워싱턴 포스트 논평을 통해 비판해 온 주요 이슈들이기도 합니다. 한때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했던 것으로 알려진 자말 카쇼끄지는 아랍의 봄 이후 본격적인 정치 세력화를 꾀했다가 위축된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동정심을 자신의 칼럼을 통해 공개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여러가지 유무형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형제단 지원을 빌미로 카타르 단교 사태를 주도하고, 이란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예멘 알후씨 반군과의 전쟁과 사우디 정부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헤즈볼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진 레바논 내정에도 개입하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움직임을 더욱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요.
2.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권력강화로 붕괴된 사우드 씨족 내 견제 구도
사우디 사회의 성격을 결정짓는 사우드 씨족과 이슬람 성직자들 간의 세력 균형 외에 또 하나의 축은 사우드 씨족 내의 세력 균형입니다. 사우드 씨족 내에서 왕위를 승계받기 위해 거쳐야 할 핵심 정부 조직은 독자적인 군사조직 국내안전보장국을 갖고 있는 내무부 (위에서 소개해드린 분노의 날에 사진찍으러 다니다 불려들어간 곳이 국내안전보장국이 아닐까 싶네요), 혹은 군부입니다. 살만 국왕 부임 전의 사우디는 3명의 왕자가 권력을 나누어 서로를 견제하는 구조였습니다.
국방부- 고 술탄 빈 압둘아지즈 왕세제 및 살만 빈 압둘아지즈 현 국왕 계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수다이리 세븐)
국가방위부- 고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전 국왕 계열/ 무타입 빈 압둘라 왕자 (전 국가방위부 장관) (소수파)
내무부 (국내안전보장국)- 고 나이프 빈 압둘아지즈 왕세제 계열/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자 (전 왕세질) (수다이리 세븐)
사우드 군부의 삼각 구도는 종교 세력과의 세력 균형은 물론 사우드 왕가 내에서도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인 정국운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절묘한 균형추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소수파벌인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왕자가 국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사우디 국가방위부를 장악하고 그 자리를 지켜낸 덕분이었죠. ([정치] 압둘라 사우디 국왕과 그가 위상을 강화시킨 자신의 권력 기반, 사우디 국가방위부 참조) 압둘라 국왕이 온건한 개혁정책을 추진해왔던 것도 종교 세력은 물론이거니와 국방부와 내무부를 장악한 수다이리 세븐의 두 왕자들의 견제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압둘라 국왕이 견제 구도를 개편해보고자 자신의 측근을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시켰다가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 주도로 결국 내쫓긴 바도 있었죠. 이 사건은 당시 위키피디아에도 소개가 되어있지 않았을 정도로 듣보잡 왕자 중 한 명이었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가 제 블로그 포스팅에서 처음 등장하게 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정치] 압둘라 국왕, 칼리드 빈 반다르 국방차관을 지명 6주만에 전격 경질, 그리고 그 배경 참조)
압둘라 국왕파와의 왕위 계승전을 승리로 이끌며 살만 국왕의 취임과 더불어 사우디의 경제와 국방을 손아귀에 넣은 무함마드 빈 살만 부왕세자는 아버지 살만 국왕의 칙령을 통해 2017년 6월 내무부 내 국왕 직속의 독자적인 사정기관 설립을 발표한지 불과 4일만에 내무부 장관을 겸임했던 차기 왕위 계승자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세질을 실각시키고 자신이 왕세자로 오른 뒤, 11월에는 숙청의 밤을 통해 눈엣가시였던 국가방위부 장관 무타입 빈 압둘라 왕자마저 비리혐의로 전격 체포하면서 사우디 역사상 최초로 어느 국왕도 이루지 못했던 3대 군부 조직을 장악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왕자, 기업인 등 유명 인사들의 잇단 체포로 인한 혼란에 묻혀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 과정에서 반대 여론을 누르기 위한 목적이 담겨있는 국왕 및 왕세자 모욕죄 처벌안을 추가한 테러방지법을 발표한 것은 반대세력을 탄압하는데 힘을 실어준 신의 한 수였습니다. ([정치] 대규모 숙청작업으로 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권력투쟁기 참조)
조국을 떠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저격수가 된 자말 카쇼끄지의 비극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에 의해 내무부를 이끌었던 무함마드 빈 나이프 왕세질이 실각한 사건은 자말 카쇼끄지로 하여금 사우디를 떠나 미국으로 향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젊은 왕세자의 손에 사정기관을 포함한 내무부 일체가 넘어갔고, 그의 주변 인물들이 하나둘씩 체포되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에게는 너무나도 뻔히 보였을테니까요. 만약 그가 사우디를 떠나 미국으로 가지 않았었다면, 우리는 지난해 11월 숙청의 밤에 체포된 유명인사들 중 한 명으로 자말 카쇼끄지를 기억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을 견제할 가능성이 높은 잠재적 위험요소가 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불과 몇 년만에 잠재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내부적으로는 정부 주도의 성직자 조직과 내무부의 사정기관을 앞세워 자신에게 반발하는 세력들을 지속적으로 체포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이를 감추려는 듯 사우디 국민은 물론 사우디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외국 언론들의 관심을 모으는 화려한 개혁정책들을 잇달아 발표했습니다. 그간 금기시해왔던 여성운전 허용, 경기장 출입 허용조치 등에서 볼 수 있듯 평소의 사우디였다면 몇 년에 걸쳐 사회적인 논의를 거친 후에나 겨우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정책들이 비전 2030, 네옴 발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측근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사우디 내부에서 아무런 중간 토의과정도 없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에 의해 극적으로 발표되는 방식으로 말이죠.
대외적으로는 크게 주목받지 않은 상황에서 사우디 내부의 자체적인 견제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사정기관을 앞세워 정작 잡아들여야 할 극단주의자들은 잡지 않으면서 애먼 비판세력을 잠재운 채 견제세력 없이 추진되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에 의한 일방적인 개혁정책 추진과 자신이 지지하는 무슬림 형제단(+알후씨 반군+헤즈볼라 등등....)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큰 성과를 거두지도 못하면서 무리수를 두는 외교정책에 대한 반발은 수십년 동안 친정부 언론인이자 정보원 활동을 했던 그를 불과 몇 년만에 대표적인 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언론인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기 뜻대로 정권을 장악하게 된 사우디와 달리 반 무슬림 형제단 및 이슬람 세력을 모토로 예멘, 레바논, 카타르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외교 및 국방 정책에서는 뜻한 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통하지 않는 미국으로 넘어가 워싱턴 포스트를 통해 자신의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자말 카쇼끄지가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의 행방불명 며칠 전 블룸버그와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는 자말 카쇼끄지처럼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건설적인 비판은 환영한다고 밝히기까지 했지만, 그가 사우디에 있었다면 무슨 명목을 만들어서라도 잡아넣고 싶었을테니까요...
이스탄불에서 사라지기 3일전 영국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 참석해서 BBC와 가진 비공식 대화가 자말 카쇼끄지가 행방불명 되기 전 세상에 남긴 마지막 인터뷰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당초 비방용 대화였지만 그가 행방불명된 후 BBC에 의해 녹취록이 전격 공개된 이 인터뷰 (Jamal Khashoggi: 'People who get arrested are not even dissidents' 참조)에서 자말 카쇼끄지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이끄는 사우디 정부가 심지어 정부를 비판하지 않는 사람들마저 잡아들이고 있다며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고도 여론탄압을 계속하고 있는 그를 비판하면서 자신은 현재의 조국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습니다. 그리고 3일 뒤 자말 카쇼끄지는 이스탄불에 있는 사우디 영사관으로 들어간 뒤 행방불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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