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둔야 아부 탈립, 여성 스포츠의 불모지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사우디 태권도 여자 국대 선수

 

 

이달 말 프랑스에서 열리는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사우디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는 여자 태권도 국가대표 선수 둔야 알리 아부 탈립입니다. 여학교에 체육수업이 도입된 게 이제 막 10년 밖에 안 되는 사우디 여성 스포츠의 개척자이자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권도 선수로서 그녀의 이야기는 사회의 관습과 국가의 지원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여학생에게 스포츠가 허용되지 않았던 사회에서 시작한 태권도

국내 언론에서도 소개되었듯 1997년생인 그녀는 여덟살 때 아버지에게 이끌려 남동생과 함께 태권도 도장에 등록하면서 태권도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알리 아부 탈립의 선택은 여러모로 의외였습니다. 사우디가 여성들의 스포츠 활동은 물론, 직관도 불어할 정도로 폐쇄된 사회였고, 그 당시 태권도가 사우디에서 인기가 있었던 격투기 종목은 아니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그래서 태권도를 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목받지 않는 종목인만큼 티 안나게 수련을 시켰을 수 있었겠죠. 딸을 태권도의 길로 이끌었고, 그녀의 성공을 그 누구보다 좋아했을 아버지는 딸의 성공을 미처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 그 이유를 직접 들을 수는 없게 되었지만요.

 

적당히 남자아이인척 하며 태권도 수련을 시작했지만, 5년 뒤인 2010년경 도장에서 강제로 퇴관당하면서 수련의 길이 막히게 됩니다. 어렸을 때야 남자아이들과 적당히 뒤섞이며 수련을 할 수 있었겠지만, 10대가 되고 본격적인 2차 성징이 시작되면서 남자아이인척 하기는 더욱 힘들어졌을 테고 도장에서도 더 이상 눈감아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겠죠.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 남자아이들과 겨루기를 하고 훈련을 받았던 것이 자신의 태권도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태권도 도장에서 더 이상 딸을 수련시킬 수 없게 되자,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사회상으로는 딸이 선수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사비로 사범을 초빙하여 집에서 폐관 수련에 들어갑니다.

 

그녀가 폐관 수련에 돌입했던 2010년대에 2012년을 기점으로 사우디 여성 스포츠계는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사회적 관습을 넘어 2012년부터 시작된 사우디 여성 스포츠

사우디는 IOC가 여성들의 인권을 문제삼아 올림픽에 여성 선수들을 출전시키지 않으면 퇴출시키겠다는 압박 속에 2012년 8월 런던 올림픽에 사우디 역사상 첫 여자 국가대표 선수 두 명을 출전시켰고,

• [인물] 걸프 비즈니스 선정 2012년 사회, 문화부문 가장 영향력 있는 아랍인 Top10

 

같은 달 베니스 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된 사우디 최초의 장편 영화 와즈다는 사우디 사회와 여성 인권에 대한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 [영화] 국내 첫 공개되는 사우디 영화, 제14차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 "와즈다"

 

이런 주목에 부담을 느꼈는지 이듬해인 2013년 사우디는 처음으로 여성 전용 스포츠 클럽을 허가하고, 여성들의 자전거와 사륜차 운전을 허용한 데다, 10월에는 첫 사우디 여성 태권도 사범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 [사회] 사우디는 건국 후 처음으로 여성 스포츠 클럽을 허가하기로 결정! 
• [사회] 여성운전허용의 신호탄? 공공장소에서 사우디 여성의 자전거, 사륜차 사용을 허용하기로!
• [사회] 첫 사우디 여성 태권도 사범 탄생!

이러한 변화와 함께 2013년에는 사립 여학교에서의 체육수업을 허용했고, 이듬해인 2014년에는 이를 공립 여학교로 확대시켰죠.

 

이러한 변화와 함께 2018년부터는 여성들의 오랜 염원 중 하나였던 경기장 직관을 허용했으며,

• 2017.10.30 - [GCC&GU/사우디] - [사회] 사우디, 2018년부터 그간 제한해왔던 여성들의 경기장 출입을 허용키로!

 

2019년 아마추어 리그로 시작한 여자 축구가 2022년부터는 프로 리그로 개편되었고,

2022.10.13 - [야!쌀람!풋볼/사우디 리그] - [기타] 세 시즌 만에 양대 리그 체제로 개편된 사우디 여자 프리미어 리그 개막!

 

 

축구 외에도 종합 스포츠 육성차원에서 당초에는 2020년에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로 인해 미뤄졌던 사우디의 전국체전인 사우디 게임즈가 2022년부터 개최되면서 여러 종목에 걸친 엘리트 선수 육성의 기회를 열게 됩니다. 

 

 

연맹의 지원 속에 터진 그녀의 포텐

아버지의 후원 하에 폐관수련을 해왔던 그녀는 2019년에 걸프지역에서 열렸던 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며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 자신을 태권도의 길로 이끌었고 멘탈이 나갈 때마다 다잡아줬던 최고의 후원자였던 아버지가 코로나로 사망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법대를 졸업하고 집에서의 수련을 이어갔다고 하죠.

 

2020년 도쿄 올림픽 출전권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던 그녀의 실력과 커리어는 2021년 사우디 태권도 연맹이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튀니지에 은메달을 안겨주었던 러시아 코치 쿠르반 보그다예프를 남녀 국가대표팀의 새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일취월장하게 됩니다.  

 

쿠르반 보그다예프 감독이 처음 만났던 그녀는 아무리 폐관수련을 10년 넘게 해왔다고는 해도 그저 그런 선수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선수로 소개받았을 때의 첫인상은 태권도 선수로서의 수준은 낮았지만, 성장하고 성취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는 선수였다고 하죠. "열심히 훈련하고, 항상 자신을 믿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지만 올림픽 유망주가 되기엔 부족했다는 평가였습니다.

 

실제로 그가 사우디 국대 감독에 부임했던 2021년 말 기준 세자리 수에 머물렀던 그녀의 태권도 선수 랭킹을 봐도 눈에 띌만한 선수는 분명 아니었죠. 

 

하지만, 새로운 감독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실력이 일취월장한 그녀는 다음해인 2022년 11월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열린 세계태권도 선수권에 출전하여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룹니다. 남자 선수 세 명과 함께 출전했다가 유일하게 메달을 딴 것이죠.

 

그와 더불어 세자리 수였던 그녀의 랭킹은 2022년 말 두 자릿수로 급상승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는 동안 무릎의 반월판이 찢어지고, 오른쪽 망막이 찢어지는 두 가지 부상을 입으면서 좌절감과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고, 힘들 때마다 자신의 멘털을 잡아줬던 아버지의 부재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녀는 결국 태권도 연맹 회장에게 연락해 국대에서 은퇴하겠다는 결심을 밝혔지만, 태권도 연맹 회장은 그녀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대신, 오히려 동기를 부여하고 멘털을 다 잡아줬다고 하죠. 

 

 

훈련에 가장 먼저 참석하고 가장 늦게 도착한 성실한 훈련태도를 보여온 그녀는 동기부여까지 되면서 훈련량을 더욱 늘렸고, 쿠르반 감독은 그녀에게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도록 지도했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2023년에는 여러 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랭킹은 더욱 상승하게 됩니다.

 

 

사우디 여성 스포츠에 새로운 역사를 쓴 2024년.

그녀는 2024년들어 사우디 여성 스포츠사에 새로운 기록을 잇달아 세우게 됩니다.

 

3월에는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의 아픔을 딛고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2024년 파리 올림픽 진출권을 자력으로 획득합니다. 이로 인해 그녀가 올림픽에 출전한 최초의 사우디 여자 국대는 아니지만, 사우디 여자 선수 중에 처음으로 지역 예선에서 자력으로 진출권을 획득한 선수로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올림픽 무대에 첫 출전했던 2012년 런던 올림픽 이후 지난 도쿄 올림픽까지 출전했던 사우디 여자 선수들은 지역예선 등을 통과해 출전권을 얻은 선수들이 아니라 초청 선수, 혹은 지역 쿼터 배분에 따라 선택된 선수였으니까요.

 

 

염원하던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한데 이어 6월에는 주종목은 아니지만, 53kg에서의 선수 랭킹이 세계 4위로 상승하게 됩니다. 사우디 역사상 최초로 사우디 남녀 선수를 통틀어 격투 스포츠 세계 5위권 안에 이름을 올린 선수가 된 것이죠.

 

사회적 관습으로 인해 외부의 지원없이 아버지의 의지만으로 시작했지만 지난 2년 간의 일취월장으로 커리어 하이를 갱신하고 있는 그녀는 사우디 스포츠부가 주목하는 스타 선수가 되었습니다.

 

 

1972년 뮌헨 올림픽부터 올림픽에 출전했던 사우디는 지금까지 은메달 2개 (육상, 승마)와 동메달 2개 (승마, 가라테)를 딴 것이 전부입니다. 그녀가 사우디 남녀 국대를 통틀어 혼자 출전하게 된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사우디 여자 선수 최초로 올림픽에서 메달을 거머쥐며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지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