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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회] 어쩌다 아랍에 엮여 네트워크를 무대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온지 30주년을 맞이한 건에 대하여...

둘라 2024. 2. 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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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전 쌩노가다의 산물이자 모든 것의 시작

 
 

1. 어쩌다 들어가게 된 아랍어과 (1994)

처음으로 대학입시 원서를 낼 때까지 뭔가 하고 싶었던 것도 없었던 데다 "아랍"의 "아"도 관심이 없었던 고딩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1975년생은 지난 세기 막판인 90년대 닥친 모든 큰 변화의 시발점에 서 있었습니다.

  • (아마도? 서울 한정) 1991년 고등학교를 가려는데... 객관식인줄 알았던 시험에 처음으로 주관식이 도입되었고,
  • 1994년 대학교를 가려는데... 학력고사가 폐지되고 수학능력시험이라는 것이 처음 생겨 두 번이나 봐야 했고
  • (남자 한정) 군대를 가려는데... 1975년생은 인원이 부족하다고 해서 신검에서 4급을 받아도 방위나 공익이 아닌 현역으로 가야만 했으며,
  • (94년에 입학해 휴학없이 졸업하는 학생 한정)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야 하는데... 졸업 선물로 IMF가 두 팔 벌려 맞이하고 있는...!!!!

 
이런 와중에 첫 대학 입시 원서를 쓰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알게된 "아랍어과".
 
90년대만 해도 제1차 걸프전으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긴 했지만, 오일쇼크의 단물이 빠진 상황의 한국에서 중동이나 아랍은 그야말로 관심 밖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아랍어과를 지원하게 된 동기는 단순했습니다. "외대 서울 캠퍼스에 있는 (어차피 모르긴 마찬가지인) 다른 특수 외국어과에 비해 뽑는 인원이 많아서 추가합격의 가능성이 그나마 높지 않겠냐…"
 
3월 첫 수능 모의고사를 쳤을 때 새로운 방식에 적응을 못한 탓에 반타작도 안되는 200점 만점에 99점 몇, 4월에 98점 몇점을 맞다가 1차 본시험을 145.2점인가를 맞게 되니 갖게 된 "인 서울"의 꿈. 처음 시행되는 제도라 신뢰할 만한 기준이 없는 배치 사정표상 다군에 있었던 외대 서울 캠퍼스를 가려면 아랍어과부터 시작해 이란어, 마인어 등등등 그야말로 알지도 못했던 외국어과들만이 사정권에 있었는데 (왕산 캠퍼스는 영어과를 쓸 수 있었던...), 아랍어과만 유독 50명을 뽑았던 것이 결정적인 지원동기였습니다. 나머지 과는 30명 밖에 안 뽑았거든요.
 
말이 씨가 된다고...
 
1994년 1월 31일 지금처럼 온라인이 아닌 외대 대운동장 벽보를 통해 발표한 3차 추가 합격자 명단에는 아랍어과 추가 합격자 명단 38명과 예비 합격자 38명이 있었는데, 제 이름은 예비 합격자 38명 중 무려 38번째!!! 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 앞에 있는 75명 중 등록을 하지 않은 이탈자가 많아야 기회가 생긴다는 건데, 이건 누가 봐도 사실상의 불합격을 확인사살하는 듯한 기분이었달까요.
 
하지만... 그로부터 3일 뒤, 서울극장에서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보고 집에 왔더니 외대에서 연락이 와서 아랍어과에 추가 합격이 되었으니 내일 오후 12시까지 입학금을 내면 입학시켜 주겠다는데 어떻게 하겠냐는 부모님 말에 일단 진학을 결정합니다. 재수한다고 된다는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 그걸 각오하면서까지 가고 싶었던 곳도 없었으니까요.

 
 

2. 인생의 전환점이 된 모든 것의 시작, 아랍 연감 (1994)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처럼 별 생각없이 들어온 아랍어과에서 받은 첫 리포트가 제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될지는 몰랐습니다. 입학 전 새터에서 당시 인기 있던 TV 애니메이션 "시간 탐험대"에 등장하는 한 캐릭터와 닮았다며, "압둘라"란 별명을 얻긴 했지만요.

부캐 닉네임의 시작

 
입학한 첫 날 첫 수업에서 받은 리포트는 기왕에 아랍어과를 들어왔으니 어떤 나라에서 쓰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냐며 "아랍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들에 대해 정리해 와라...였습니다.
 
사실 대학생활 첫 리포트를 제출할 때만 해도 별 생각은 없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찾은 연합 연감을 이용해 적당히 레포트에 필사해서 제출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적당히 낸 리포트를 다른 반에 있던 과동기가 보고 싶어하면서 그 모든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가뜩이나 악필인 레포트를 보여주기는 싫었는데, 20페이지 정도 필사했던 리포트를 대학 입학선물로 처음 받았던 PC에 아래아 한글로 타이핑해 보니 몇 페이지 안 되네요? 4페이지였나?
 
악필을 숨기는 김에 빈약해 보이는 분량을 좀 더 늘리고 싶었습니다. (이때부터 설명충 기질이 다분했.....)
 
기본 데이터조차 특정 국가에만 몰빵 되어 있는 연합 연감이 아닌 다른 레퍼런스가 필요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추가하고 싶은 정보가 생깁니다. 한국어 자료가 많지 않아서 남들 미팅가는 1학기 봄에 미팅 대신 외대 도서관은 물론,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과 여의도 국회도서관까지 찾아봤지만 역시나 자료는 얼마 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주제도 너무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식민통치의 경험이 많은 영어나 프랑스 자료야 많은 건 당연한 거겠지만, 오히려 역사적인 연관고리도 많지 않아 보였는데, 전문적인 자료에서 오타쿠스러운 자료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이 있었던 일본어 장서목록이 대딩 신입생의 마음에 강렬하게 남았죠.

그래서... 결국 국가 정보의 레퍼런스를 연합 연감에서 나름 균등하게 정보가 소개되어 있던 교도통신사의 세계 연감 (일본어 한 달 배우고 시작했다는 것이 함정.)으로 바꾸고, 시사용어사전이나 김정위의 중동사 등 눈에 띄는 레퍼런스를 추가하여 세계 연감은  직접 번역하고, 대학교 입학과 함께 처음 다루게 된 컴퓨터로 혼자 입력, 편집 등을 하다 보니 1학기가 훌쩍 지나갔고, 4페이지짜리 리포트는 어느새 약 300페이지 분량의 아랍 연감이라는 책자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다 똑같은 일을 2학년 1학기 때도 한 번 더하게 되면서 필사로 대충 써서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리포트는 어느덧 중동사에서 90년대 초반까지의 국가 정보를 담은 500페이지가 넘는 자료집으로 확장됩니다.

요즘처럼 붙복이 아닌, 책자 안의 모든 글자 하나하나를 아래아 한글로 직접 타이핑하는 경험을 통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앞서서 경험했으나, 아직은 세상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지 않았던 시절에 쌩노가다로 만들어서 최소 주문수량이었던 20부만 뽑았던 두 권의 책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대학교 1~2학년 1학기에 쌩뚱맞게 이런 일을 혼자 벌리고 보니, 어느덧 전공인 아랍어 보다 아랍어를 쓰는 나라, 혹은 지역에 더 관심을 갖게 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3. 경험 속에 시야를 넓힐 수 있었던 요르단 연수 시절 (1998년)

신검에서 4급을 받고도 1975년생이라는 이유로 현역을 갔다가 결국 의병 제대로 나온 후 휴학하면서 10개월간 요르단으로 아랍어 연수를 다녀오게 됩니다. 그 전에 제주도도 가보질 않아서 머리털 나고 처음 타본 비행기의 도착지가 당시 라마단이 한창이던 요르단 암만이었다는 것도, 도착 당일 내리던 가랑비가 점점 거세져 자고 일어나니 눈 덮인 세상으로 바뀌면서 고립되어 버린 상황에서 시작한 10개월 간의 경험은 잊지 못할 경험을 안겨주었습니다.

하필, 어쩌다보니 IMF때 가게되어 태어나서 처음 환전했을 때 환율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1달러에 1,936.40원이었을 때라 쓸 수 있는 돈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황에서 그 전 어학 연수생들에 비해 여유로운 생활은 불가능했지만, 그 와중에도 잊혀지지 않는 경험들을 하면서 중동과 아랍에 대한 개인적인 시각이 자리 잡혀 나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 애니메이션 캐릭터 때문에 붙은 별명이긴 했지만, 무슬림이 아니라면 압둘라란 이름을 함부로 써서는 안되겠다.... (요르단에서 아랍어 이름으로 압둘라를 쓰다보니, 막상 압둘라란 이름이 아랍어로 "알라의 종복"이라는 의미여서 사람들이 매일 무슬림이냐고 물어보더라는... 그래서 부캐의 닉네임이 한국어로는 압둘라의 앞 글자인 "압"을 뗀 둘라, 영어로는 abdullah에서 ab을 뗀 dullah가 되었다는 웃픈 사연이...)
  • 학교에서 배우는 풋스하와 일상생활에서 쓰는 로컬 암미야의 차이 (한국어에 비유하면 말은 현대 국어지만, 글은 훈민정음체라...)로 인한 일시적인 전공자 벙어리 생활...
  • 이스라엘에 의해 내쫓겨 요르단에 정착하게 된 팔레스타인계 요르단인이 순수 요르단인에게서 느끼는 차별의식과 한국에선 익숙하기만 했던 미국 중심의 시선이 얼마나 내로남불었는지를 새삼 느끼게 해 준 이들의 생활
  • 인근 국가에서 전쟁이 난다는 데도 상사 주재원들 챙기느라 얼마 되지 않는 학생들 보호엔 알아서 대처하려 관심조차 없었던 대한민국 대사관에 대한 거부감
  • 아무 생각 없이 혼자 갔다가 마주한 팔레스타인 난민촌 사람들의 세상 싸늘한 시선에 바로 다음 버스로 나왔던 일
  • 지금은 못 가는 나라가 되었지만, 시리아에서 맞이했던 따뜻함과 낯설었던 나이트 문화
  • 다채로운 자연과 함께 잡탕 문화였던 레바논
  • 유명한 관광지보다 시와 오아시스에 더 꽂혔던 이집트 여행
  • 일련의 경험을 통해 책으로 접했던 것보다  안 좋아졌던 이스라엘에 대한 이미지를 경멸로 굳혀버렸던 국경 검문소 직원들의 위압감 등등...


특히, 10개월 동안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 들고 다녔던 일본 여행 가이드북 "地球の歩き方 지구를 걷는 법- 요르단/시리아/레바논 편과 이집트 편)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1994년 봄 도서관 투어에 이어 이쪽 동네에 대한 한국어 자료가 없구나...를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한국에서도 이를 번역하고 정리한 "세계를 간다" 시리즈가 나오긴 했었지만, 이집트 정도의 주요 국가 가이드만 나왔을 뿐 관광객이 별로 없을만한 나라의 번역서는 따로 내놓지 않았거든요. 물론... 그 덕인지 특히 이집트를 3주 반 여행하는 동안 시와 오아시스에서 마주쳤던 이를 정 반대쪽은 후루가다에서 다시 만나는 등 거의 매일 숙소에서 일본인 관광객을 마주쳤을 정도였으니까요
 

 

4. 레반트 지역을 벗어나 걸프 지역으로의 진출, 본격적인 외노자 생활의 시작 (2000년)

IMF 때 즈음하여 현지 연수 경험자가 거의 없을 시기여서 도서관 장서 분류, 통역 알바 등 알바를 하기엔 좋았지만, 앞서도 말씀드렸듯 아랍어과에 있어서 90년대는 관심을 받지 못했던 암흑기였습니다. 1999년 4학년 때 과 취대를 맡았지만, 1년 동안 취업 의뢰가 들어온 곳이 동아건설 (리비아), 기아자동차, 장안평 중고차 업체뿐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1, 2학년 때 저질렀던 일이 있기에 이 녀석은 (때마침 국지대도 생겼겠다...) 공부를 계속하지 않을까라는 대학원 선배들의 예상과 달리 취업을 선택하게 됩니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학교에 남아 자리 잡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이 선택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전공을 살려 아랍과 중동지역을 공부하기 위해 계속 학교에 남은 것도 아니면서, 생업에 종사하는 직딩이라고 보기엔 아랍과 중동지역에 대해 그 누구보다 더 많고 다양한 정보를 기록하고 공유하는 관찰자라는 부캐를 수십 년째 이어오는 보기 드문 캐릭터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 시절에 전공을 살린 제 동기들은 결국은 국가정보원이나 코트라, 외교부,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거든요. 선후배를 따져도 이런 케이스는 거의 없;;;;;;
 
결국은 대학 졸업 후 한 업체에서 인턴 비스무리한 생활을 하다, 좀처럼 갈 수 없을 것 같았던 사우디에 가볼 수 있다는 말에 사우디 지잔 외곽의 변방지역에서 공사를 수행하는 단종 업체의 통역직 직원으로 첫 번째 외노자 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연스레 20세기엔 레반트 지역에 머물렀던 관심이 21세기와 함께 걸프 지역에 꽂히게 되는 시기가 되었죠.


첫 사우디 외노자 생활 때는 그야말로 오프라인 모드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스폰서의 동의가 필요해 휴대폰도 만들지 않았지만, 정작 만들어봐야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지역에서 살았기에 그야말로 무용지물. 당연히 인터넷도 들어오지 않아서 4MB도 아니고 400KB 파일을 보내기 위해 쌀라 시간을 피해 사무소에서 왕복 140km 길을 달려 인터넷 카페를 이용해야만 하는 그야말로 원시적인 환경이었으니까요. 일단 현장 자체가 지세기 험한 전기없는 지역에 전기를 넣어주는 일이었던 터라...
 
이런 상황에서 통역직으로 갔지만, 현장 사무소에 있던 유일한 행정직 직원이었던 본부장님이 비자 문제로 사우디 복귀가 불가능해지고 대체 인력을 구하지 않아 퇴사하는 그날까지 가르쳐주는 사람 하나 없이 닥치는 상황에 대응하는 전천후 사무잡부로서의 능력치를 속성으로 익히는 과정이었습니다. 20대 후반의 막내뻘 직원임에도 불구하고 현장 소장과 현장 인력팀간 알력 다툼사이에서 끼여있던 건 덤.

 
 

5. 본격적인 네트워크의 유령이 되다 (2005년)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때마침 세상이 네트워크화되면서 대학교 1학년 때 받았던 신선한 충격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무대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처음 만들었던 아랍 자료집이라던가, 요르단 어학연수를 하면서 이용했던 가이드 북의 정보 시차 (새로운 곳이 생겼다던지, 없어졌다던지...)를 경험하고는 주위에 피드백을 부탁하며 공유를 했었지만, 정작 소프트 카피 형태로 제공한 파일은 누군가의 홈페이지에 그대로 올라왔으며, 여행 가이드 정보에 대한 피드백은 전혀 없었죠.
 
그러던 와중 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카페에 만들었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아라버를 알아볼까"라는 카페는 온라인 접속이 불가능한 깡촌에서의 사우디 외노자 생활을 하면서 그냥 묻히는 듯했지만, 9.11 테러를 계기로 갑자기 회원수가 급증하고 아랍어 스터디에 관심을 보인 후배가 나타나면서 일반인을 상대로 한 오프라인 스터디 모임으로 변하게 됩니다. 
 
첫 번째 외노자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 본격적으로 그간에 끄적였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찾게 됩니다. 예전처럼 기껏 만들어 놓은 자료가 누군가의 홈페이지에 그대로 올라가는 건 싫었고, 이젠 정보 외에도 외노자 생활을 통한 경험치가 쌓이기 시작했으니까요. 
 
과거 싸이월드에서 장문의 글을 쓸 수 있었던 페이퍼를 시작으로 정보의 네트워크화에 뛰어들면서 마침내 페이퍼에서 썼던 글들을 옮겨 2005년 12월 5일 [사회] 사우디에서의 여성 이란 첫 글로 "둘라의 아랍 이야기"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시작합니다. (현재는 다음 블로그가 티스토리로 통합되면서 둘라뱅크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변경). 그러고보니 내년 말이면 블로거 생활도 20주년이 되는군요.
 
네트워크 초창기에 유행했던 개인 홈페이지를 처음 만들었을 때의 주소 (dullahbank.com.ne.kr)로 사용했던 둘라뱅크 (dullahbank/ "(압)둘라(의 아랍 데이터) 뱅크"에서 줄임)는 단독 도메인 계정 확보 (dullahbank.com) 에 이어 한국에 상표권으로도 등록한 개인 브랜드화가 되어 블로그, 유튜브 채널,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으로 이어지는 관련 사이트의 공통 아이디로 사용하게 됩니다.
 

간혹 동일인이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는데... 네이버 지식인에서 유명한 전투적인 수호신과는 1도 상관이 없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모를 셀프로 내세울 권위도, 최고 전문가 되겠다는 욕심도 없이 관심분야만 파는 네트워크의 유령일 뿐이니까요. 그나마 생업이 걸린 본캐도 아닌 재능기부 수준의 부캐 활동인데...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특허청에 상표권까지 등록한, 활동하는 모든 사이트에서 사용하는 이름을 놔두고 왜 하필 같은 장르에서 다른 이름으로 활동하겠어요? 아이디가 있기에 생성만 해놓고 정작 사용하지는 않지만, 혹시나 싶어 녹색 사이트에서도 dullahbank란 아이디를 만들어 놨을 정도인데요 뭐.

썰렁한 안내 포스팅만 있는 네이버 블로그.

 


여러 SNS채널을 두고 있지만 블로그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 이유는 1994년 봄 도서관 투어에서 느꼈던 그 강렬한 기억을 혼자서 구현할 수 있는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한국에서 아랍이란 시류에 편승해 관심도의 기복이 심한 데다 특정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이슬람포비아를 더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마이너 한 분야라서 타이밍에 따라서는 책을 만드는 것 조차 쉽지 않지만, 블로그란 무대는 그동안 경험하고 체득한 오타쿠스런 정보에서 전문적인 정보까지 관심 있는 정보를 맘내키는 대로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물론 1인 활동이니 활동에 기복은 있지만, 나혼자 산다 모드로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는 것도 한 몫하지만요.
 
최근에는 유튜버로 활동해보는 건 어떠냐를 얘기하시는 분들도 많지만 포스팅 후에도 문장을 다듬는다던가, 놓친 정보를 업데이트 해야 할 경우 언제든지 글수정을 종종 하는 스타일 상 유튜브는 재업 외에는 영상 수정이 불가능해서 아직은 정보 없이 블로그에 참고영상으로 올릴만한 영상 위주로 올리는 채널로만 운영하고 있을 뿐입니다.
 
블로그에 분량을 제한하지 않고 사진이든 글이든 푸는 이유는 설명충인 탓도 있겠지만, 처음 다음 카페를 만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 블로그는 "특정 지역을 전문으로 다루고 있지만, 어쩌다 들렀을 뿐 사전 정보가 없는 방문객이 들를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포스팅을 하기 때문입니다. 배경지식이 있다면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모르는 분들에겐 어쩌다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낯선 내용에 벽을 느낄 수도 있고, 요즘 트렌드처럼 확 축약해 버리면 놓치는 부문이 생기기 마련이며, 국내 정보가 그다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도 흥미위주로 왜곡하거나 잘못된 경우들도 많기에 어차피 관심있는 분들이 찾는 정보 사이트라면 되도록 정확한 정보를 이야기하듯 풀어내자는데 목표를 삼고 있습니다. 블로그 에디터에 기능이 생기면서 배경 설명에 마침 예전에 올린 포스팅이 있을 경우 관심있으실 분들을 위해 더 파보라는 의미로 링크를 걸어두는 기능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죠. 보실 분들은 링크까지 다 찾아서 보시고, 사전 정보가 있으신 분들은 스킵하고 본문만 보시라는 의미로 말이죠.
 
SNS 등을 통해 세상이 네트워크화가 되면서 좋아진 점은 이전에 비해 정보 수집하는 채널이 훨씬 다채로워지고 쉬워졌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뉴스를 보려고 해도 각 신문사 사이트를 일일이 방문해야 했지만, 지금은 SNS 채널이나 페이지를 팔로우만 하면 실시간으로 피드가 올라와 관심 있는 토픽을 골라서 찾아 볼 수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정보 획득에 관심이 있다면 SNS에 굳이 개인 자료를 올릴 필요없이 관심있는 페이지만 팔로우해서 정보 수집용으로 사용하기에 좋다고 권장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블로그에 올리는 포스팅이나, 굳이 포스팅까지 하진 않아도 공유하고 싶은 정보를 전달하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페이지도 운영하고 있는 셈이구요.
 
학계든 어디든 저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분들도 많겠지만, 둘라라는 부캐는 네트워크 상에서 검색하다 보면 언젠가 한두 번은 걸리게 되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아랍과 관련된 잡다한 정보를 전문적으로 꾸준하게 공유하는 정보 제공자"라는 관점에서 보면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6. 걸프지역 축구 소식, 호텔 정보 등 관련 주제의 확대

1인 블로그다 보니 블로그의 주제나 내용 등이 당시의 상황과 맞게 유동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초창기에는 첫 연수 및 여행지역이었던 레반트 지역을 중심으로 자료를 모으고 다뤘지만, 사우디 외노자 생활을 하면서 걸프지역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두 차례의 사우디 외노자 생활 자체가 하루 쉬는데 다녀올 곳이 거의 없었기에 관심 있는 뉴스와 정보를 번역하고 늘어난 짬을 활용해 이를 각색해서 올리는 정도였지만, 점점 소소한 계기를 통해 전문 분야가 하나둘씩 늘어나게 되더군요.
 
경기 전술을 분석하고 논할 정도의 축구 전문가는 아니지만, 축구 커뮤니티 등지에서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신뢰성 높은 걸프지역 전문 축구 블로거라는 캐릭터를 얻게 된 건 2009년 이천수의 알나스르 이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때마침 사우디에서의 두번째 외노자 생활 중이었고, 긴 근무시간과 하루 밖에 없는 휴일로 인해 갈 만한 곳도 없는데 TV 중계는 볼 수 있었으니까요. 어차피 유럽이 아닌 이상 한국 미디어가 관심을 가질 일도 없는 지역이라 가쉽거리 외에는 소식을 전하지도 않기도 하구요.


주말에 시간 죽이려고 시작했던 축구 소식 포스팅은 직간접적으로 선수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며 15년 넘게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선수들이 이쪽 동네로 이적하면 한국 미디어들의 관심 지역 밖이라 활약을 했든 못했든 한국에서 소식을 꾸준하게 접하기 쉽지 않은데, 생판 들어보지도 못했던 듣보잡 블로그 하나가 꾸준하게 선수들 소식을 전해주니까요. 사우디 리그에서 시작했던 축구 소식은 한국 선수들의 이적과 함께 서아시아를 대표하는 걸프지역 3개 리그 소식으로 확장되면서, 이 동네 소식만큼은 누구네들처럼 노골적으로 사심을 드러내지 않는 정보를 제공해오고 있기에 기레기들보다 더욱 신뢰할 수 있는 걸프지역 축구 소식통이라는 평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블로그를 통해 가끔씩 포스팅하긴 하지만, 초창기엔 전형적인 기사체와 거리가 먼 블로그체를 그대로 기사로 쓰는 기레기도 봤던 데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전하지 않고 클릭수 유도를 위해 개인의 사심 (私心)인지 데스크의 사심 (社心)인지 모를 사심을 담뿍 담아 소설을 쓰는 국내 기레기들의 수준에 대해서는 할많하않...
 
개인적인 경험과 정보 공유 위주의 활동에 아쉬움을 갖고 있던 차, 사우디 외노자 생활 2기를 마친 후, 대학교 졸업 때 하지 못했던 국지대에 뒤늦게 진학해서 석사 학위를 딴 뒤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UAE에 나갈 기회가 생겨 현직장에서 세번째 외노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그동안 일회성으로만 다룰 수 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분야가 추가됩니다.
 
바로 신상 호텔 리뷰 등의 여행 정보.
 
드넓은 땅덩어리에 비해 쉬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물리적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사우디 외노자 생활과 달리, 주말이 충분히 확보되고 이동거리가 사우디에 비하면 세발의 피 수준인 데다 관광객 및 거주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공간을 계속 만들어내는 두바이를 중심으로 한 UAE의 개발정책으로 인해 갈 만한 계속 생기니까요.
 
블로그에서 본격적으로 UAE 호텔들을 소개하기 시작한 로브 다운타운 두바이부터였습니다. 네... 뭔가 호텔을 오랫동안 많이 다닌 사람 같지만, 실제론 40대 들어서야 시작했다는 거죠...


워낙 개성 있는 다양한 콘셉트의 호텔들이 문을 열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개장 한 달 이내의 신상 호텔을 주로 방문하게 됩니다. 이름이 알려져 자리 잡기 전보다 투숙객이 상대적으로 적을 가능성이 높고, 동네 특성상 완전히 개장된 상태가 아니다 보니 호텔에서 놓칠 수 있는 하자 등을 컴플레인하는 대신 피드백해 주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기 때문입니다. 호텔 측에서도 개장 초기인만큼 그런 피드백에 상당히 잘 호응해주기도 하구요.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은 화재로 문을 닫았다가 재개장한 어드레스 다운타운 두바이의 1호 투숙객이 되어 비록 1박이었지만 스위트룸으로 업그레이드받고도 전체 숙박비를 호텔에서 대신 내주어 무료로 이용한 적이 있었네요. 
 
내돈내방이다 보니 직접 투숙해 보고 싶어도 못 가는 곳들도 있지만 호텔이든, 관광지든 단순히 어디를 다녀왔다가 아닌, 관련된 TMI를 담뿍 담은 리뷰가 되다 보니 사진 선정과 포스팅에 10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큰 일이기에 자료는 구해놓고 귀찮아서 포스팅 타이밍을 놓치고 넘기는 경우도 종종 생기게 됩니다. 몇 군데가 그래서 밀렸;;;;
 
우연한 계기로 스스로 발을 담구면서 시작된, 하지만 생업이 걸린 본캐가 아닌 "둘라"라는 부캐로 네트워크 상에서 나름의 독보적인 아카이브를 구축해오고 있는 관찰자로서의 행보.
 
2024년 3월 2일 아랍어과 입학 30주년이자, 평생 관계가 1도 없을 것 같았던 아랍지역과 엮이게 된 지난 30년을 떠올리면서 소회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네트워크의 유령으로 지내 온 행보가 앞으로 5년, 10년 뒤엔 또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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